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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연(Jae Yeon YOO)

유재연(Jae Yeon YOO)

유재연은 현실과 환상이 부딪치는 상황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고 말한다. 둘 사이의 충돌에 떨어진 부스러기들을 모아 시각화한 것이 그의 작품이다. 더 넓은 공간으로 옮긴 노블레스 컬렉션은 그 기념비적 출발로 노블레스 컬렉션의 안목을 집약한 <문라이트 펀치Moonlight Punch>전을 제시한다. 전시를 앞둔 작가에게 작품과 전시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작품이 전반적으로 재치 있어요. 그런데 안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표현하는 방식과 작품에 실제로 담긴 내용 사이에 차이가 있는 듯해요. 시각적 부분은 유년기부터 쌓인 성향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거든요. 그때 푹 빠져 있던 게 바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었어요. 애니메이션을 보며 내러티브나 색감을 어떻게 시각화해야 전달력이 좋은지 자연스레 배웠고, 미적 취향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호하는 표현 방법이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긴 힘들어요. 반대로 작업의 진행 과정이나 내용은 진지하거나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전면에 내세우진 않습니다. 오히려 재미있게 표현하다 보니 작품을 처음 보는 분들이 귀엽다면서 어렵지 않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곧 그 안에 전복된 내용이 있음을 캐치하고 겉과 속의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차리죠.

간극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요? ‘괴리’라고 할까요. 풀어서 설명하면 사회와 개인, 과거와 현재, 현실과 이상 등 서로 다른 것이 만났을 때 나오는 미묘한 감정요. 예를 들면, 녹록하지 않은 현실을 겪으며 성장한 모습이 어릴 때와는 꽤나 다르잖아요. 이런 차이점이 부딪칠 때 나오는 파편을 보여주는 게 기본 철학이에요.

드로잉적 요소가 눈에 띄어요. 일반적으로 드로잉이라고 하면 작품의 부수적 요소로 여기는데 이걸 전면에 내세운 이유가 있나요? 드로잉에서 강렬함을 느꼈어요. 무심코 노트를 훑었는데, 몇몇 드로잉에서 형용할 수 없는 힘을 느꼈죠. 스피디한 선과 있는 그대로 담긴 순수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걸 확대하면 어떨까 궁금했어요. 작업 과정의 일부로 분류되는 드로잉을 사람과 같은 크기로 확대하면 새로운 틈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이 과정에서 마커 드로잉을 그대로 옮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어요. 드로잉의 속도감, 물성 등을 유화로 구현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고, 특히 유화와 마커의 색감을 똑같이 맞추는 데 심혈을 기울였어요. 덕분에 만족스러운 크기와 두께감을 지닌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이번 신작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탄생했고요.

‘Make Her Hurt, Make Her Fly’처럼요? 맞아요. ‘Make Her Hurt, Make Her Fly’도 노트에 끄적거린 손바닥만 한 낙서를 크게 키운 작품이에요. 관람객이 보는 방향에 따라 가슴을 압박하는 폭력적 모습이 되거나 비행기를 태우듯 공중 부양하는 유희적 이미지가 될 수도 있죠. 이렇게 제 작품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인물의 관계가 전복돼 이들이 자아내는 양면적 맥락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줍니다. 컬러가 없는 드로잉이라 선의 비정형성을 부각하고 싶어 유화 대신 네온이란 재료를 선택했어요.

신작 중 전시 타이틀과 동명인 ‘문라이트 펀치 Moonlight Punch’ 시리즈가 인상 깊었습니다. ‘밤에 찾아오는 사유에서 출발한 이미지의 길고도 짧은 여행’이랄까요. 간단히 말하면 밤의 드로잉을 모아놓은 회화 조각 시리즈예요. 보통 새벽 감성이라고 하죠? 저도 밤이 무의식을 끌어올리는 시간대란 점에 공감해요. 삶 속에 일상과 환상이 공존하는 걸 직접적으로 느끼는 때라 더욱 자연스러운 드로잉이 탄생하곤 하죠. 그렇기에 제 작품 철학인 ‘간극’과 ‘무의식의 드로잉’이란 두 요소를 더 잘 나타낼 수 있다고 여깁니다. ‘문라이트 펀치’란 타이틀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왔어요. 문라이트는 말 그대로 달빛을 뜻하지만, 펀치는 물리적 폭력과 과일주스란 상반되는 의미를 담고 있죠. 이처럼 재미있는 드로잉인데 몽유병, 꿈 등 그 안에 숨어 있던 것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는 의미예요.

드로잉이 꽤 쌓였을 텐데, 그중 출품 작품을 선별하는 것도 쉽지 않았겠어요.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머금고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했어요. 단순히 ‘좋다’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계속 보고 싶고 끊임없이 생각할 거리를 주는 드로잉 위주로요. 이야기가 있는 것을 고르다 보니 모아놓았을 때 조화가 깨지면 어쩌나 걱정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같이 설치해놓으니 한 작품처럼 보였어요. 무의식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그 안에 담긴 건 제 생각이 응축된 결정체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드로잉은 순간순간의 생각을 담은 개별 작품이면서 동시에 비슷한 맥락을 지니게 되는 것 같아요. 비유하자면 ‘스티커’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간에나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고, 어떤 것과 매치해도 곧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조화롭게 녹아들죠.

‘문라이트 펀치’를 회화 조각이라 칭했는데 다소 생소한 개념입니다. 작품의 베이스가 회화란 점에서 착안한 겁니다. 패널 위 유화 작품이라 평면 같으면서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패널 간 이음매 때문에 입체적이기도 합니다. 보통은 부조라 칭하죠. 그런데 저는 조각 베이스 작가도 아닐뿐더러, 제 작업에 회화성이 강하게 투영되기에 부조란 이름이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회화 조각에서 조각이란 개념도 ‘sculpture’보단 ‘piece’에 가까워요. 앞서 말한 스티커와 일맥상통하죠. 미술사나 철학적으로 개념화된 것은 아니지만 제 작업이 회화에 기반을 두고 있단 점을 각인시키는 용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 다른 점이 있다면요? 한결 여유로워졌어요. 런던 생활을 시작한 2011년을 기점으로 환경이 급격히 바뀌다 보니 많은 게 달라졌죠. 작품으로 한정 지으면, 어슴푸레한 런던 날씨 때문인지 색감이 파스텔 톤이 됐습니다. 주위의 영향을 받는 편이라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마음가짐도요. 작품활동을 막 시작했을 땐 제 전부를 보여주겠단 욕심이 컸어요. 지금 돌이켜보니, 화면에 너무 많은 걸 담아내려 애쓴 것 같아요. 이젠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을 진솔하게 담으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기다림의 자세가 필요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좀 더 천천히 가죠. 물론 아직 젊은 작가라 계속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겠지만요.

주로 런던에서 활동하죠? 서울에서도 자주 작품을 보고 싶은데, 향후 계획이 어떻게 되나요? 일단은 이번 전시에 몰두하고 싶어요. 노블레스 컬렉션의 새로운 공간을 여는 전시다 보니 준비한 게 많아서요. 이후엔 ‘문라이트 펀치’ 시리즈를 좀 더 발전시켜나갈 계획이에요. 물론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할 생각입니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진행 박소희, 임슬기, 명혜원   사진 JK